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문단 편집) === 이념적 색채 논란 === [[홍범도]]를 제외한 나머지 4인은 [[공산주의]]와 아예 무관하며, [[이회영]]과 [[김좌진]]은 [[아나키스트]], [[이범석]]과 [[지청천]]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에도 관여한 [[우파]] [[민족주의]] 인사이다. [[홍범도]]의 경우에도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기는 했으나 [[공산주의]]를 적극적으로 신봉하거나 추종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소련에 살면서도 한국 -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운동의 관점에서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관점에서든 - 에 해악을 끼친 것도 없다. 따라서 이념적인 색채를 핑계삼아 흉상 철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 [[박승환]]은 애초에 [[일제강점기]]가 시작하기도 전인 [[1907년]]에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당연히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도 [[공산주의]]나 [[자유주의]] 등 근대 사상과는 접점이 없었으며, 오히려 한국사 최후의 [[유교|유교적]] [[신민]](臣民)이자 [[양반|무반]]에 가까운 일생을 보냈다. 그는 [[조선]] 말에 과거 시험을 통해 군문에 들어 [[대한제국]] 시기에 자결하기까지 평생 동안 유학적 덕목에 따라 조정과 군주에 충성하였다. * [[지청천]]은 [[https://biz.heraldcorp.com/view.php?ud=20230825000570|'대한민국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과 [[이승만 정부]]의 초대 무임소장관을 지냈었으며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을 지내고, 해방 이후 제1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의 병역법을 창시한 인물이다. 심지어 지청천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지지자였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 직전과 초기 북한을 경계하며 국군의 전쟁준비태세와 방어태세를 강조했던 인물이다. * [[이회영]]과 [[김좌진]]은 생전에 [[아나키즘|아나키스트]]에 가까운 사람으로, 생전 활동 내내 공산주의와 대립 관계였으며 심지어 박상실이라는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이는 2002년 방영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다룰 정도로 꽤 잘 알려진 사실로, 그의 아들인 [[김두한]]은 야당 인사이면서도 [[백의사]]와 매우 가깝게 지내며 [[심영(배우)|심영]] [[내가 고자라니#s-6.2|암살 미수]], [[정진룡]] 살인 사건 등의 백색테러를 일으킬 정도의 적극적인 [[반공주의자]]였다. 손녀인 [[김을동]] 역시 현재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이기도 하고. *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이범석]]은 생전은 물론 현재까지도 좌파는 커녕 '[[파시스트]]', '[[파시즘]] 동조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인물이다. 당시 [[일민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이면서 [[대한민국 국군]]의 기초를 다졌다고 하기에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46-1950년 한국군의 숙군]]에도 깊게 연관되어 있으며, 좌익 계열에 대한 집단 처형과 같은 대대적인 제거 작전을 승인했다. 실제로 [[이종섭]] 장관 역시 홍범도를 제외한 4인에 대해서는 “'''그분들은 아닌데,''' 육사에 독립운동보다 '''창군 이후 군사적 분야'''에 대해서만 하는 게 좋겠다는 개념 설정을 하게 된 것”이라는 핑계를 댔으나, 창군 이후 인물들의 흉상을 비치하는 것은 현재 육사 내에 위치한 5인 흉상을 유지하는 것과 전혀 충돌하는 사안이 아니다. 양자 모두 [[육사]]와 연관이 있는 상징적인 인물인 만큼 '''함께''' 비치할 수도 있고 위치를 조금씩 달리하여 비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술하겠지만 해당 독립운동가들, 특히 (너무 오래 전의 인물인) 박승환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육군과 육사에서 오랫동안 뿌리로 삼아 왔던 인물들인지라 그조차도 설득력 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국 공산주의 관련 논란을 소거법으로 지워가다 보면 [[홍범도]] 장군만이 남는다. 홍범도가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어쨌든 역사적인 사실이다 보니, 실제로도 나머지 인물들은 워낙 근거가 터무니없다 보니 진영을 막론하고 비판이 대세로 굳어지는 와중에도 홍범도 장군의 사례에서는 옹호론과 비판론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상황이다. 해당 논란에는 크게 두 가지 쟁점이 있다. >1. '''홍범도는 __정말로__ 공산주의자인가?''' >2. '''공산주의와 __얼마나__ 연관이 있는 사람까지 배제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범도가 (공산주의에 어느 정도 동조적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홍범도]] 장군은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고는 하나, 자신의 기록에서 적극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설파하거나 주창한 적은 없었다.[* 장세윤,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 역사와 현실 121, 2021, 20-21쪽.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764985|#]]] 또 소련으로 넘어가서 한국에 해가 되는 일을 한 적도 없으며,[* 같은 독립운동을 했어도 북한 정권 창립 및 남침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김원봉]]이 재평가에도 건국훈장을 수여받지 못한 것과 희비가 엇갈린 지점이다.] 주로 [[집단농장]]에서나 근무하였다.[* 반병률, "홍범도(1868-1943)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재해석", 국제한국사학 1, 2013, 110쪽. [[https://www.earticle.net/Article/A237656?mode=pc|#]]] 심지어 1937년에는 [[소련]]의 최고 지도자이자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까지 당했다.[* 반병률,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과 고려인 사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 634쪽.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37786|#]]] 또한 홍범도 개인의 이념이 아니라 '''[[191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 활약했던 독립투쟁단체의 수장'''이라는 직위에 초점을 둔다면, 소련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당대의 국제정세로 보나 투쟁 환경으로 보나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만약 홍범도가 본격적인 활동을 벌인 시기가 [[1930년대]] 중반이었다거나, [[스탈린]]의 [[소련]]을 지지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해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며 [[코민테른]]의 마리오네트가 되어 움직였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스탈린주의]]는 그 이념적 잔혹성과 극단성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회했으며, 스탈린 본인도 현대 [[사회주의]] 진영에서 '국가자본주의'라고 비난할 만큼 억압받는 민족들의 해방보다는 [[소련]]의 국가주의적인 영광에 심취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공산주의 세력 대신 '''[[중화민국]]이라는 훨씬 합리적인 대안'''[* 실제로 [[카이로 회담]]에서 [[스탈린]]도 [[루즈벨트]]도 별 생각 없고 심지어 [[처칠]]은 강하게 반대했던 한국독립을 밀어붙여 관철시킨 것은 [[장제스]]였다.]이 생겨났으며, 서방 영미권도 반일적인 입장으로 돌아서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중국호로군과 함께 손 잡은 [[지청천]], 중국혁명군과 손잡은 [[양세봉]]이 대표적인 경우다.[* 지청천의 경우 해당 이유로 중국에서도 인정받는 군인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굳이 저런 대안들을 내버려두고 스탈린의 소련이나 마오의 중공 등 공산주의를 파트너로 골랐다면 그건 그 사람이 빼도박도 못하는 [[공산주의자]]라는 소리이며, 기실 [[백범일지]]에 적힌 "일본에서 독립해서 소련에 나라를 갖다 바치려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부류의 인간들을 비난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40년대 만주~화북에서 공산당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임정을 적대하고 팔로군 등에서 중화민국의 항일전쟁수행을 방해했으며, 죽지 않았으면 거의 어김없이 북한으로 가서 전범이 되었다. 반면 홍범도처럼 앞선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임정의 영향력을 인정했으며, 해방 이후엔 대한민국으로 귀국해서 정부수립을 돕거나 좌우연정을 시도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홍범도가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1910년대]]~[[1920년대]]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던 [[일본 제국]]은 [[영일동맹]]으로 [[대영제국]]의 비호를 받고 있었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미국]]과도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급격히 해체되었고,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정세는 불안정했으며, 한때 영일동맹 견제 수준에서나마 [[조선]]에 관심을 보였던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점점 상태가 나빠진 끝에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그 세계대전의 승전으로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획득했고, 자연히 어느 나라도 이런 강대국과 굳이 척을 지면서 조선독립을 도울 마음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식민지의 해방을 이념적으로 밀어붙였던 [[소련]]과 공산 진영은 당연히 독립운동가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련도 겉으로는 식민지 해방을 외치면서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독립운동 세력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핀란드 내전]]에 개입하여 괴뢰국을 세우려 하는 등 [[내로남불]]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고, 1차대전 종전 시점인 [[1920년대]]가 되면 [[미합중국]]도 열강의 지위를 획득하고 본격적으로 세계의 탈식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으니, 이를 두고 [[소련]]이나 [[공산주의]]를 '''유일한''' 혹은 '''무조건적인''' 해방자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련은 동유럽에서야 자신이 [[사회제국주의|제국주의]] 침략자였을지라도 동아시아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유에서 [[일본 제국]]을 위협적인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의 국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조선독립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이런 측면에서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어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관심)이 비교적 덜했던 '''미국에 비해서도, 소련이 적어도 (홍범도가 주로 활동했던) 20년대까지는 확실히 더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소련을 투쟁의 무대로 삼고자 했다면 [[소련 공산당]] 가입은 사실상 선택지가 없는 문제였다. 범위를 좁혀서 국제 정세가 아닌 지역 정세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한반도]]를 장악한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로 이동했다. 당시 만주는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소련]], 중국계 만주 군벌들, 그리고 [[몽골]]이나 [[만주]]계 독립세력 등의 각축장이었다. 그런데 [[1910년대]]의 [[북양군벌]]이든 그 이후의 혼란상을 거쳐 [[1920년대]] 말 이후로 정권을 잡은 [[장쭤린]]의 [[봉천군벌]]이든, 중국령 만주의 지배자들은 세력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인접한 강대국인 [[일본 제국]]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친일적인 입장을 취하곤 했다.[* [[장쭤린]]은 [[황고둔 사건]]으로 일본에 의해 암살당하긴 했지만, 그 직전까지도 [[일본 제국]]과 밀약을 맺어 만주에서 일본의 치안활동, 즉 한인 독립운동가 체포나 구금에 협조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암묵적으로 한인 독립운동을 눈감아주거나 정보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을 견제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중국 동북 지역이 북한에 그다지 우호적이진 않으면서도 [[북한이탈주민]]들은 체포하고 북한 독재정권에 넘기곤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 [[러시아 혁명]] 이후 패망해서 쫓겨온 러시아 백군의 잔존세력들[* 대표적으로 몽골의 [[로만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가 있다.] 역시 소련 적군의 위협에 맞서 [[시베리아 출병|자신들을 지켜줄 반공진영의 최대 물주]] 일본 제국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몽골]]이나 [[만주]] 역시 [[푸이]]와 [[만주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거대한 중국 본토 통일국가[* 예컨대 [[중화민국]].]의 압력에 맞서 자주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본 제국에게 손을 벌렸다.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으며, '''여기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세력은 바로 이들 모두와 적대하는 [[소련]]이었다'''. 게다가 [[만주사변]]을 전후해 일본이 본격적으로 만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서조차 쫓겨나 [[김구]]와 [[임시정부]]처럼 [[중화민국]] 정부를 따라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든, [[소련]]의 손을 빌리든, 아니면 아예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 외교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든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국 독립세력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똑같이 저 네 세력(일본제국, 만주 독립군벌, 러시아 제국, 유목민족)을 적대했던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완전히 다른 이념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1949년]] [[국부천대]] 직전까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이어갔던 근본적인 이유이며, 또한 그 중화민국이 한국 독립세력의 최대 후원자였던 지정학적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오늘날 그 누구도 장제스가 소련과 협력했다고, 혹은 심지어 [[장징궈]]가 소련에 유학했다고 공산주의자라며 비난하지 않는다. 또한 1920년대를 활동했던 인물로서 현실적인 한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도 서방 진영과 소련은 알력 다툼이 심했고, [[조지 오웰]]처럼 [[스페인 내전]] 등에서 [[공산주의]] - 정확히는 [[현실사회주의]] - 의 전체주의적 속성을 깨닫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비판했지만, 적어도 이후의 [[냉전]] 시기처럼 대놓고 적대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당대 지식인들이 바보도 아니고 모두 친[[공산주의]]적이었다는 건 명백한 견강부회이나, 적어도 ([[마르크스주의]]나 [[스탈린주의]]적 독재는 부정할지라도) [[사회주의]]적 대의에 대해서는 지금보다도 우호적인 시선이 많았다. 이러한 경향성은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주변국들을 침략하면서 체제의 범죄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던 [[1940년대]] 기준으로 더 과거일수록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예컨대 [[러시아 혁명]] 시기의 혁명가들은 나름대로 이상론적인 대의를 품고 있었고, 서구의 지식인들은 이를 낭만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이러한 기조는 [[1937년]] [[스페인 내전]]의 [[국제여단]]까지도 이어졌다. [[1920년대]]를 살았던, 그것도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느라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해 무학에 가까웠던 홍범도에게, 당대 서구 사회의 지식인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소련]]의 범죄적 실체나 심지어 [[1980년대]] [[미국]]의 학자들조차 쉽게 예상하지 못했던 [[공산주의]]의 궁극적 패배를 예상하고 손절하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에 가깝다. 적어도 그가 북쪽의 누구마냥 그 이념을 추종하다가 무언가 사고를 친 것도 아닌 바엔 더더욱. 그런 면에서 짚고 넘어가자면, [[홍범도]]는 광복 이전인 1943년에 별세해서 [[김일성]]의 [[북한]] 정권에 직접 가담 내지 동조할 일이 아예 없었다. 이 점에서 [[의열단]], [[한국광복군]] 출신이나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해 주로 비교 대상이 되었던 [[김원봉]]과는 사례가 다르다.[* 일각에서는 [[김원봉]]이 이후 김일성에게 염증을 느끼고 한국으로 귀순하려고 했다는 주장 때문에 동정론이 나오기는 하나, 김원봉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당했을 뿐이고 그전까지는 적극적으로 6.25 전쟁에 찬동했았고 전쟁 당시 북한의 핵심 고위직을 맡았기 때문에 [[전범]]이자 부역자인 사실이 바뀌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유사한 사례로 [[김옥균]]을 들 수 있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당시 일본과 협력했으니 "일본과 친교한다"는 사전적 의미에서는 친일파라 볼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먼저 개혁에 성공한 이웃 나라의 손을 빌린다는 차원이었을 뿐 개인적 욕심의 발로도 아니었고 사직[* 물론 [[조선]]은 엄밀히 따지면 [[국왕]]의 전제군주국이었고, 그런 관점에서는 "고종의 국가"에는 해를 끼쳤다고 볼 수는 있다. 실제로 당대 조선의 인식도 반역자였고. 그러나 국왕이 아니라 국체와 국민에게서 사직의 의미를 찾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사직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평가된다.]과 민족에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또한 김옥균도 [[을사조약]]이나 [[경술국치]] 등 더러운 꼴을 보기 전인 1894년에 사망하여 원천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영합할 수가 없었고, 이는 홍범도가 광복이나 대한민국 수립 이전인 [[1943년]]에 사망하여 시간적으로 북한의 침략전쟁 및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과도 비슷하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은 [[공산주의]]에서 갈라져나온 [[주체사상]] 국가인 [[북한]]을 주적으로 두고 있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규정하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대한민국 헌법|헌법]]은 소위 '공산전체주의'를 배격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가면, 대한민국이 적대하는 대상은 ''''공산주의'가 아닌 '북한''''이고, 그것은 __상대(북한)가 어떤 체제든 간에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국가'''__이기 때문이며, 단지 그 국가가 하필 공산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도 같이 적대할 뿐이다. 이는 북한이 아니라 가상적국 관계인 [[중국]]을 상대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물론 우리도 자유민주주의를 잘 지켜나간다는 전제 하에서 주변국 중 자유와 민주, 인권 등이 잘 정착된 국가들과는 [[민주평화론|대체로 지킬 것이 많은데다 충돌을 피하고 최대한 대화와 외교로 풀어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굳이 싸울 일이 없기야 하겠지만]], 논리학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가가 적이 아니"라는 것이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모든 국가는 적"이라는 결론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당장 우리 주변국 가운데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정반대에 위치한 극우 독재국가에 가깝지만 팽창주의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어 국군이 예의주시하는 대상이며, 반대로 [[베트남]]은 공산주의, 심지어 공산당 일당독재가 유지된다는 점에선 "공산전체주의" 국가이지만서도 우리나라나 주변국에 특별한 위협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홍범도]]는 [[한국전쟁]]은커녕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지기도 이전에 죽은 사람이며, 만약 그가 조금 더 늦게 태어나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항일전쟁 시기엔 [[팔로군]]에 부역했지만 독립 이후 [[대한민국]]에 참여하며 [[지리산]]의 종북 [[빨치산]]들을 토벌하기까지 했던 [[차일혁]] 총경 같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홍범도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우리들이 단순히 공산당 가입 이력만으로 그를 공산주의자라 섣불리 낙인찍을 수 없는 이유다. 공산당 가입 이력 하나만으로 폄훼하기에는, 홍범도는 [[8.15 광복]]과 [[남북분단]] 이후 북한 김일성 정권에 부역했던 인물도 '''아니고,'''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3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홍범도 입장에서는 나라를 되찾겠다고 평생을 가시밭길만 걷다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는 것도 한인데, 후손이자 후배란 작자가 사상검증을 하겠다고 모욕일 일삼으니, 죽어서도 편치 못한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